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도시형 한옥이 남아 있는 마을이다. 조선 후기에는 상촌(上村) 또는 우대라 불렸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왕족, 고관대작의 집과 별장도 도처에 있었지만, 주로 말단관리인 경아전(京衙前)들이 많이 살았다. 상촌인이라는 말은 경아전(京衙前)과 동의어였다. 조선 말기에는 중인 지식인들의 시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어 여항(閭巷) 문학운동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시인 이상과 윤동주, 화가 노천명, 이중섭, 천경자, 이상범 등이 이 일대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주변길
· 예술 산책 길경복궁 돌담 옆 골목 사이에 자리한 30여 개의 갤러리와 공방을 둘러볼 수 있다. 오래된 한옥과 근대 건축물을 개보수한 카페 및 문화공간이 모여 있다.
· 추억 길고서점·철물점 등의 오래된 가게들과 재래시장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1960~70년대의 서울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 골목여행 길체부동 골목길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 중 하나이다. 이 골목길에서는 경복궁 서쪽 마을의 소박한 삶과 문화를 느낄 수 있다.
< 기념물 제31호 >
인왕산 기슭의 첫 번째 계곡. 청계천 지류의 발원지로서 커다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그윽하고 아름다워 수성동(水聲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성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승경지(勝景地)로서 조선 후기 문예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수성동」이라는 그림을 남겼으며, 송석원 시사(松石園詩社) 등 중인 계층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시사(詩社)들도 수성동과 그 주변에서 자주 시회(詩會)를 열었다. 수성동의 지형과 경관은 1971년 이 자리에 옥인시범아파트를 지으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나, 2010년 서울시에서 아파트를 철거하고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하였다.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 문화재자료 제1호>
순종 황제의 처삼촌 윤덕영(1873∼1940)이 1938년 딸에게 지어준 2층 벽돌집으로 1930년대 호화 주택의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72년부터 박노수 화백이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던 집인데 2011년 종로구에서 건물과 소장품1,000여 점을 기증 받아 종로구립미술관을 개관하였다.
황학정
< 유형문화재 제25호 >
사직공원 뒤의 황학정은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 내에 건립된 사정(射亭)이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군사 훈련 겸 민간놀이로 성행하여 서울 곳곳에 활터가 만들어졌는데, ‘사정’이란 활터에 건립한 정자를 말한다. 조선 후기 경복궁 주변에는 풍소정·등룡정·운룡정·대송정·등과정 등 다섯 사정이 있어 이를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 했다.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짓자 황학정은 등과정 자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황학정은 지금도 사정으로 이용된다.
통인시장
7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복궁 서쪽의 통인시장은 서울에서도 몇 군데 만지 않은 재래시장이다. 서울시가 지정한 ‘서울형 전통시장’으로서 시장 안에서는 수시로 다채로운 예술문화행사가 열리며, 주변에 경복궁·광화문·청와대 등 문화 유적과 관광 자원도 많아 젊은이들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통인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도시락 카페’이다. 이 카페에서 엽전을 구입한 뒤, 시장 내 반찬가게를 돌아다니며 엽전과 반찬을 교환하여 식판에 담아 와 먹는다. 통인시장의 이름난 먹거리로는 떡갈비, 기름떡볶이, 간장떡볶이 등이 있다.
부암동
창의문 밖으로 나가면 한적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동네가 있다. 이 동네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돌을 붙이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 온다. 이 바위를 부침바위, 한자로 부암(付巖)이라 하는데, 부암동이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북한산·백악·인왕산에 둘러싸인 이 동네는 계곡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과 안평대군의 별서(別墅) 무계정사 터, 반계 윤웅렬의 별장 부암정, 백석동천 등의 문화유산과 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등의 문화시설이 있다. TV 드라마 < 커피프린스1호점 >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환기미술관
부암동 골목길에 자리 잡은 환기미술관은 한국 근대 서양화의 거장 김환기를 기념하여 1992년 개관하였다. 현대적이고 절제된 조형언어를 바탕으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인 김환기의 예술 작품을 보존·연구·전시하고 있다. 이밖에 각종 기획 전시, 문화 행사, 교육 프로그램 등도 운영한다.
석파정과 서울미술관
< 유형문화재 제26호 >
창의문 바깥, 바위산 중턱 서울미술관 안에는 석파정이 있다. 19세기 중엽에 당대의 세도가 김흥근이 지은 집인데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이 되었다. 석파(石坡)는 이하응의 호이다. 본래 일곱 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만 남아 있다. 2012년 8월에 개관한 서울미술관은 ‘황소' · '자화상(1955)' · '환희(1955)' 등 이중섭의 작품 19점을 비롯하여 박수근 · 천경자 · 김기창 · 오치균 등 한국 근현대 거장의 작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안평대군 이용 집터 (무계정사 터)
< 유형문화재 제22호 >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의 별장이 있던 자리이다. 1451년 안평대군이 꿈에서 도원(桃源)의 모습과 흡사한 이곳에 무계정사라는 건물을 세우고 심신을 단련하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사약을 받고 죽은 1453년(단종 1) 이후에는 이곳도 폐허가 되고 지금은 ‘무계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와 그 터만 남아있다.
반계 윤웅렬 별장 (부암정)
< 민속문화재 제12호 >
조선 말~개화기의 무신(武臣)인 윤웅렬(1840~1911)에 창의문 밖 부암동에 지은 별장이다. 1906년 건립 당시 서양식 2층 벽돌 건물만 세웠으나, 1911년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셋째 아들 윤치상이 상속 받아 안채를 비롯한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부암동 백석동천
< 명승 제36호 >
부암동 백석동천은 조선시대 별장이었던 곳으로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이라 적힌 바위가 있다. 백석동천(白石洞天)의 ‘백석’은 ‘백악’을 뜻하고,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백악의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뜻이다. 백석동천은 자연경관이 잘 남아있고 전통조경 양식의 연못, 육각정자 주춧돌, 안채와 사랑채의 건물터가 잘 남아있다.
북정마을
와룡공원 옆에 성북동으로 빠지는 한양도성 암문이 있다. 문 밖에 그림처럼 펼쳐진 마을이 북정마을이다. 1960-70년대에 건축된 500채 정도의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1960-70년대 서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재개발 문제로 주민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나 ‘찾아가는 마을학교’ 교육과 마을공동체 활성화 등을 통해 자치적으로 해소해나가고 있다. 북정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지역 특성을 살린 ‘Wall月축제’를 열어 지혜와 역량을 모으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다. 북정미술관에서는 주민들이 기증한 옛 사진을 전시한다. 북정마을 주변에는 만해 한용운이 말년에 거처한 심우장, 상허 이태준 가옥, 성북동 최순우 가옥 등 품격 있는 한옥도 다수 남아 있다.
월월축제
‘월월’은 성곽(Wall)과 달빛(月) 아래에서 세대 간의 벽과 마음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라져가는 공동체 의식과 행복한 삶의 회복을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창의적 프로그램이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
< 기념물 제7호 >
북정마을 바로 아래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던 심우장이 있다. 성북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있어 좁은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나온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마주 하고 싶지 않다는 한용운 선생의 뜻에 따라 북향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상허 이태준 가옥
< 민속문화재 제11호 >
소설가 이태준(1904∼?)이 1933년부터 10여 년간 거처하며 ‘황진이’, ‘왕자 호동’ 등을 집필했던 곳이다. 그가 사용했던 고가구 · 소품 · 책 등이 지금도 집 안에 남아 있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이름지었다. 수연산방이란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집’이라는 뜻이다. 별채 중 하나는 전통찻집으로 운영된다.
성북동 최순우 가옥
< 등록문화재 제268호 >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이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의 평면 형태는 ‘ㄱ자’ 본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마주 보고 있는 ‘튼ㅁ자’형 구조이다. 1930년대 서울 지역에서 유행한 한옥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간송미술관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전적(典籍), 서화(書畵) 등을 기반으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급 문화재와 국내 최고 수준의 서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1년에 두 번, 5월과 10월에 각 보름씩 소장품을 공개하는 전시회를 연다.
북촌 한옥마을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던 옛 이름으로 현재의 재동·가회동·계동·삼청동 일대에 해당한다. 예로부터 종친(宗親)과 고관(高官)들이 다수 거주했던 곳이라 집의 규모도 컸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말기 건축물로는 안국동 윤보선가(家)가 유일하고, 한상룡가(家), 김성수가(家) 등 1910~2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도 일부 있으나 나머지 한옥들은 모두 1930년 이후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이다.
주변길
· 삼청동 길은행나무 그늘진 굽은 길을 따라 늘어선 각양각색의 갤러리와 아트샵, 카페들이 개성있는 풍경을 이룬다.
· 가회동 길1930년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이 다수 보존된 지역으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개방형 한옥도 있다.
· 계동 길
< 서울 계동 근대 한옥 : 등록문화재 제229호 >
현대건설 사옥에서 시작해 중앙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길 좌우 곳곳에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한 여러 박물관, 학교 근처의 소박한 음식점,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는 근대 한옥, 김성수 옛집 등이 있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창덕궁 길창덕궁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주변에 각종 공방, 궁중음식연구원, 원서동 백홍범 가옥< 민속문화재 제13호 > 등이 있다.
이화마을
낙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이화동은 산비탈을 따라 가파른 계단이 나 있고, 좁은 골목에는 낡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하늘동네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은 2006년 12월,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낙산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실시되어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지고 조형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모두의 마음을 담은 작업이었기에 벽화는 동네의 상징이 되었고, 이화동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가장 가보고 싶은 마을이 되었다.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많은 관광객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으나 관광객으로 인한 소음피해, 마을경관 훼손, 쓰레기 무단투기 등으로 인해 주민들의 불편함도 증가하고 있다. 소박한 주민들의 동네, 이화동 벽화마을을 아끼고 보전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공공미술 낙산 프로젝트
1970년대 이후 이렇다 할 신규개발 사업이 없어 낡은 건물들로 가득했던 동숭동 일대가 2006년 문화관광부 공공미술추진위원회의 기획사업인 ‘ART in City 2006-낙산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미술 명소로 거듭났다. 공공미술이란 말 그대로 공중(公衆)을 위한 미술로서 거리나 공원 등 시민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에 설치, 전시되는 미술작품의 창작행위와 창작물을 말한다. 70여 명의 작가가 100여 일에 걸쳐 마을 내 주택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도심부가 내려다보이는 가드레일을 따라 조형물들을 설치하는 등 70여 개의 작품을 제작했다. 오래된 건물과 현대적 미술작품이 어우러진 이 동네는 그 자체로 거대한 박물관 겸 미술관이다.
이화장
< 사적 제497호 >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귀국한 뒤 대통령에 취임할 때(1947~1948)까지 사저로 썼던 집이다. 이 집의 별채는 조각당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구성하였다. 현재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 내외가 거주하며,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공사 중이며 2015년 까지 관람예약이 불가하다.
홍덕이 밭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효종)이 볼모로 잡혀 청나라 심양에 있을 때, 홍덕이라는 나인이 김치를 담가 매일 대군에게 올렸는데, 귀국 후 왕위에 오른 대군은 그 맛을 잊지 못하여 낙산 아래 밭을 홍덕에게 주고 계속 김치를 담가 바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서울시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낙산공원 아래에 20평 남짓 되는 작은 밭을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장수마을
낙산공원 아래 성벽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로 한국전쟁 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기원한다. 60세 이상의 노인 거주 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뉴타운 예정지였으나 주민투표로 뉴타운 재개발을 중단하고 마을재생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후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하여 지금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주민 참여형 마을재생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2013년 도시가스 공급 공사가 완료되고, 마을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주민들이 마을의 특성과 역사적 가치를 살리면서 낡은 주택과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으로 마을을 전면 철거하고 아파트를 짓는 기존의 재개발 방식과는 다르다. 북정마을, 장수마을, 이화마을 등이 마을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다.
장수마을 주민 사랑방 (http://cafe.daum.net/samsun4)
정든 이웃과 함께 살고 싶은 장수마을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같이 토론하고, 정보와 자료를 공유한다.
마을박물관
한양도성과 함께해 온 장수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는 주민들의 삶을 기록·전시하기 위해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이다. 주민에게는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관광객에게는 성곽 마을의 보전가치를 깨닫게 한다.
삼군부 총무당
< 유형문화재 제37호 >
삼선 상상어린이공원 내에 위치한 커다란 한옥이다. 삼군부는 조선 말기 변방 경비와 궁궐 수비, 도성 순찰 등의 군무(軍務)를 통할한 최고 군령 기관으로 관아(官衙) 건물은 광화문 바로 앞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다. 1880년 삼군부가 폐지된 뒤에는 통리기무아문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 사령부 건물이 되었다가 1930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회현동
남산 북쪽 기슭 회현동의 지명은 고종 연간에 붙은 것으로, 조선 초기에는 호현방(好賢坊), 조선 후기에는 회동(會洞)이었다. 회현동은 ‘현자(賢者)가 모여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중종 대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하여 12명의 정승이 이 동네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인근의 충무로, 명동과 더불어 대표적인 일본인 밀집 거주 지역이 되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귀환하자 주로 월남민들이 이 동네에 정착하였으며, 1960-70년대에는 남대문시장에 물건을 대는 가내 하청업체들과 소공동 명동 재개발 과정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이 동네로 이주하였다. 회현동은 남산 녹지대에 인접해 있는데다가 남산 3호 터널이 동네 한복판을 관통하는 관계로 도심부 재개발 사업의 열풍이 빗겨 간 동네여서 오래된 작은 주택들과 1970년대에 지어진 회현 제2시범아파트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네 어귀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7호 >가 있는데, 주민들은 소원을 들어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 해마다 은행나무 축제를 열고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
회현동 은행나무 축제
천연기념물 제7호인 회현동 은행나무는 조선 중종 대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정광필의 집 마당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2014년 현재 수령은 517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광필이 젊을 적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서대(犀帶) 열두 개를 은행나무에 걸게 되리라”고 하였다 한다. 서대는 코뿔소나 물소의 뿔로 만든 관복 허리띠로 1품 이상의 관리만 착용할 수 있었다. 서대보다 귀한 것은 왕이 착용하는 옥대(玉帶) 뿐이었다. 정광필의 꿈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계시한 대로, 이후 이 동네에서는 12명의 정승이 나왔다. 회현동 주민들은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마을의 안녕과 인재 배출을 기원하는 뜻에서 2012년 첫 번째 은행나무 축제를 열었고, 이를 정례화하기로 하였다.
회현 제2시범아파트
1970년대 5월 회현동 언덕에 준공된 아파트로 남산 시민아파트로도 불린다. 지은 지 40년이 지난 지금은 매우 낡은 아파트이지만, 건립 당시에는 국내 최초로 중앙난방 시설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최신식 아파트여서 고위 공직자와 연예인 등 중산층 이상이 다수 거주하였다. 2006년부터 철거 정리 사업이 진행되어 주민 절반은 집을 비웠지만,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아파트는 < 친절한 금자씨 >, < 주먹이 운다 >, < 추격자 > 등 여러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남대문 시장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으로 이른바 ‘재래시장’ 또는 ‘전통시장’의 원조이다. 조선 초에는 이곳에 상평창이 있었는데, 17세기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 창고로 바뀌었다. 1894년 조세금납화 조치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 주어 시장으로 삼았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은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 상설 시장으로 존속해 왔다. 대형 할인점의 출현과 인터넷 상거래의 활성화 등 유통 구조의 변화로 인해 상세(商勢)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남대문시장은 갖은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려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옥을 이전, 중건하여 1998년에 개장한 도시공원. 일제강점기에 헌병대 사령부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부지를 1989년 서울시가 매입하여 공원으로 단장하였다. 공원은 자연형으로 조성했고, 필동에서 들어가는 입구 쪽에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관훈동 민씨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등 조선 후기와 개화기에 건축된 한옥들을 모아 두었다. 한옥 지구 남쪽에는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할 예정이다.